히브리서 11장 말씀을 통해 믿음이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만드는 영적 능력임을 깨닫게 된다. 현대인들이 이성을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 믿음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이성을 세우는 올바른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장을 펼치며 목사님의 음성이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이 귓가에 맴돌 때마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왜 성경은 믿음을 '증거'라고 부르는 걸까?
어릴 적 나는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믿는 아이였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의심했고,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내게 '믿음'이라는 것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 말이다.
하지만 목사님은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믿음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것이다. 휘포스타시스, 즉 무언가를 떠받치는 기초라는 뜻이다. 마치 건물의 기둥처럼,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지탱하는 힘 말이다.
영적 실체가 만드는 세상
"진짜로 믿으면 영적 실체가 생긴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충격적이었다. 신천지나 공산주의 같은 거짓된 것들도 누군가 진짜로 믿으면 그 뒤에 영적인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도 사람들이 끌려간다는 것이다.
문득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사람의 믿음이 결국 수많은 나라를 공산주의 체제로 바꾸어 놓았다. 다윈의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의 윤회 사상이 불교 문화권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누군가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들도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목사님은 그렇다고 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거짓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 기도의 응답들, 설명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들. 이 모든 것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니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영적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내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이라는 왕좌에서 내려와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목사님은 현대인들이 이성을 최종 보스로 받드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이성의 허락을 받아야 믿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보려 했고, 기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해되지 않으면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것이 거꾸로 된 것이라고 했다. 믿음이 먼저이고, 이성은 그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도약'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순간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는 것.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믿어지는 것.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대학 시절, 수많은 철학책을 읽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 애썼던 밤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 기도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는 확신이 밀려왔던 순간.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주신 믿음의 도약이었던 것 같다.
두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
목사님은 크리스천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 이 말이 깊이 와닿았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보이는 세계의 사람들이다. 동시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세계에만 갇혀 있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교회는 나오지만 기도는 형식적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들에만 의존해서 사는 것. 목사님은 이를 '인본주의 기독교'라고 불렀다.
나는 어떨까? 정말로 영적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까? 기도할 때 정말로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믿을까? 아니면 그냥 심리적 위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의심이 들었다. 정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실까? 정말 영적인 변화가 일어날까?
하지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처럼,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을.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성령이 만드는 혁명
결국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로 귀결되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믿음의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이 왕좌에서 내려와 믿음이 그 자리에 앉는 '대변역'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변역을 경험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작은 했다. 모든 것을 머리로 계산하려 했던 과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려는 현재로. 보이는 것만 믿으려 했던 과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현재로.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이성이 고개를 들 때가 있고, 의심이 밀려올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럴 때마다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 된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믿음 위에 서서
예배를 마치며 찬양이 울려 퍼졌다.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그 가사가 오늘따라 더욱 의미 있게 들렸다.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여도, 귀에 아무 소리 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걸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삶이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이성이 아닌 믿음을 기초로 살겠다고.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겠다고.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은 여전히 이성을 최고로 여기고, 보이는 것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진정한 실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실체를 붙잡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처럼, 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갖고 싶다. 영적 실체를 붙잡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나도 "믿음으로 증거를 얻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오늘 밤도 나는 기도할 것이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더욱 큰 믿음의 도약을 일으켜 주시기를. 이성의 왕좌에서 믿음의 왕좌로, 보이는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인본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그 아름다운 변역이 내 삶에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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